엄대섭 : 한국 도서관 운동의 아버지, 민족 계몽의 선구자

목차

서론: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영웅

현재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책을 빌리고, 자유롭게 서가를 둘러보며, 집에 가져가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했고, 직접 책을 고를 수도 없었으며, 빌려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시스템을 바꾸고, 전국 곳곳에 도서관과 마을문고를 설립하여 ‘책 읽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엄대섭(嚴大燮, 1921-2009) 선생입니다. 그는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라 불리며, 평생을 국민 독서 운동에 바친 진정한 민족 계몽의 선구자였습니다.

1장: 가난 속에서 피어난 불굴의 의지

절망적인 어린 시절

1921년 1월 21일,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 대대리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엄대섭의 어린 시절은 극도의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다섯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8세 때 가족 모두가 생계를 위해 일본 규슈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부모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엄대섭이 국민학교 3학년이던 10세 때 제철소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어 불구가 되면서 소년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14세 소년가장의 생존 투쟁

14세부터 본격적인 소년가장 역할을 시작한 엄대섭은 두부 장수,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 견습공 등을 전전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건설현장에서 일해야 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엄대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일용품 공급을 통제하는 상황을 기회로 포착했습니다. 부잣집의 안 입는 낡은 옷가지를 사들여 서민들에게 판매하는 헌옷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기적적인 성공과 귀국

이 사업은 놀랍도록 성공했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헌옷 장사로 큰 돈을 벌어 19세 때(1941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은 돈으로 백여 두락(2만여 평)의 논과 경주 시내 기와집, 울산 강동 바닷가 멸치 어장까지 장만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장: 운명을 바꾼 한 권의 책

협화회 활동과 옥살이

엄대섭의 일본 시절에는 복잡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협화회라는 친일 조선인 단체의 간부를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협화회 회식 자리에서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다가 잡혀가 고문과 옥살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성격과 신념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해방과 새로운 시작

해방 후 고향 울산에 돌아온 엄대섭은 농지개혁 움직임을 감지하고 소작인들에게 헐값에 땅을 팔아버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은 여전히 사업에 있었습니다. 전쟁 후 혼란한 시국을 관망하며 동아대학에 늦은 나이로 적을 두고, 두서없이 헌책을 사들이며 책 읽기에 몰두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운명의 책과의 만남

그런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1951년 어느 여름날, 부산 시청 앞 고서점에서 『도서관의 실제적 경영』(圖書館の 實際的 經營)이라는 일본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오토베 센자브로(乙部泉三郞)가 1939년에 쓴 이 책을 읽고 난 후, 엄대섭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3장: 울산 사립 무료도서관의 탄생

3천 권으로 시작한 꿈

1951년 여름, 엄대섭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3천여 권의 책을 모두 가지고 울산읍내 가게를 세내어 ‘울산사립 무료도서관’을 개관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도서관 운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총알 상자로 만든 순회문고

울산읍내에서 먼 시골 지역에도 책을 보급하고자 했던 엄대섭은 전쟁 통에 많이 나뒹굴던 총알 상자로 순회문고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후에 그가 전개할 전국 단위 마을문고 운동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냉랭했습니다. 경찰이 들이닥쳐 무료 도서관 운영하는 저의가 뭔지 캐물었고,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좌익 활동이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울산의 냉대와 경주로의 이전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역 사회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엄대섭이 울산읍에 도서관 일체를 기증할 터이니 읍에서 운영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고향 울산의 공직사회는 그 당시에도 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결국 그는 1953년 경주읍에 책과 시설을 기증했고, 오늘날 경주시립도서관이 바로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60년 뒤인 2012년 울주군이 울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이라는 제목의 거창한 기획전을 연 것은 뒤늦은 반성이었습니다.

4장: 한국도서관협회 재건과 전국적 도서관 운동

사무국장으로서의 활동

엄대섭은 전쟁 통에 무너진 한국도서관협회를 다시 정비해 1955년 초대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60년에는 연세대학교 부설 한국도서관학당에서 1년 과정 사서교육을 마치고 정식 사서자격도 받았습니다.

마을문고 운동의 시작

하지만 엄대섭은 천상 야인이었습니다. 1961년 협회 사무국장직을 6년 만에 그만두고 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농촌 풀뿌리 도서관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마을문고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1960년 늦가을 경주 변두리에 마을문고 1호점을 냈습니다. 이를 위해 경주에 가진 문전옥답 4두락을 팔아야 했습니다. 마을문고는 도서관 역할을 할 문고함, 관리운영 주체인 독서회, 책 등 세 가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초기의 어려움과 돌파구 모색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1961년 1년 동안 온갖 고생 끝에 고작 26개 문고를 세우는데 그쳤습니다. 사람들은 신종 책장사가 아니냐는 오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궁리 끝에 엄대섭은 명망가를 운동의 대표로 세우려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 등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1963년부터는 문교부 사업비를 보조받기 시작했고, 1965년에는 이 글의 저자인 이용남 교수도 엄대섭에게 설득당해 문고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5장: 전국적 확산과 제도화

이후락과의 만남

1967년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마을문고 운동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엄대섭은 1967년 10월부터 이후락 비서실장을 마을문고본부 회장으로 하고 방일영 조선일보 사장과 서정귀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사장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폭발적 성장

이후 마을문고 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매년 1천 곳 이상의 마을에 급속히 문고를 확산시켜 나갔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문고지도 전담 지방조직 신설, 문고지도자 교육 강화, 읽기 쉽고 만화로 풀이한 농업기술 도서의 출간 지원 등 질적인 육성에 주력했습니다.

새마을문고로의 발전

1981년에는 새마을운동과 결합하여 새마을문고로 거듭났습니다. 근면·자조·협동 새마을정신과 독서진흥운동이 결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전국 마을마다 새마을작은도서관으로 발전하여 시민들의 건강한 문화공동체의 장이 되었습니다.

6장: 공공도서관 혁명의 기수

대한도서관연구회 창립

1983년 1월, 엄대섭은 자신의 집에 ‘대한도서관연구회’를 만들어 공공도서관 개혁운동에 나섰습니다. 당시 공공도서관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시민들의 접근이 차단된 폐가식 운영과 관외 대출 금지가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도서관이 개가식(개방식)에다 대출한 책을 집에 가져가서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국 최고의 도서관이라는 국회도서관은 노무현 정부 때까지 토요일엔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낮 12시에 문을 닫았고, 일요일엔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습니다.

전국 공공도서관 실태조사

엄대섭은 폐가식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160여 개 공공도서관에 찾아다니며 운영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1984년과 1985년, 65세의 나이에 자가운전으로 전국의 모든 공공도서관을 직접 방문한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실제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해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고생보다는 찾아간 도서관마다 새로운 참상에 부딪쳤을 때의 정신적 고통은 마치 전우의 시체를 넘는 병사의 심정이 되곤 하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언론을 통한 개혁 추진

엄대섭의 노력은 1985년 8월 11일 KBS <추적 60분>에 ‘공공도서관의 현주소’란 이름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이는 공공도서관 개혁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체 발간한 격월간 기관지 『오늘의 도서관』을 발행하고 전국의 도서관은 물론 교육, 문화, 언론, 국회, 행정기관 등에 배포하며 여론 형성에 주력했습니다. 전국의 공공도서관 운영 실태를 평가·등급화하여 민낯을 공개하고, ‘간송도서관문화상’을 제정하여 상금을 수여하는 등 그의 공격적인 개혁 운동은 도서관 현장에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7장: 국제적 인정과 말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엄대섭의 헌신적인 도서관 운동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습니다. 1980년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을 수상한 것입니다. 이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권위 있는 상으로, 그의 공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의미 있는 성과였습니다.

정부의 뒤늦은 인정

2004년에는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수십 년 공로에 비하면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은퇴와 미국 이주

나이 70을 앞두고 엄대섭은 힘에 부쳐 1987년 모든 활동을 접고 1989년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해 말년을 보내다가 2009년 향년 89세로 타계했습니다.

보안당국의 감시라는 아이러니

저자 이용남 교수는 에필로그에서 엄대섭이 미국으로 이주할 즈음 보안기관이 ‘엄대섭 사찰을 종료한다’며 자신을 찾아온 섬뜩한 일화를 공개했습니다. 정부가 해야 할 도서관 운동을 대신한 그에게 보안 당국이 수십 년 동안 의심의 눈초리로 사찰해왔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었습니다.

8장: 엄대섭이 남긴 유산과 현재적 의미

통계로 보는 변화

엄대섭이 도서관 운동을 시작할 무렵인 1960년 전국 공공도서관 수는 고작 18개관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작된 그의 운동이 오늘날 전국 어디서나 쉽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현재 새마을작은도서관은 61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전국 곳곳에서 아이들과 시민들의 문화공동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22년 대통령기 새마을문고 국민독서경진대회 등의 행사가 지속적으로 열리는 것도 그의 유산입니다.

엄대섭 정신의 현재적 계승

대구북구 구수산도서관에서는 엄대섭 선생 특별 전시를 통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울주문화예술회관의 기획전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서도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울산 매곡도서관에서 일하는 최진욱 사서는 ‘엄대섭 연구’로 학위를 받을 정도로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는 엄대섭 정신이 현재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9장: 엄대섭에게서 배우는 현대적 교훈

개인의 신념이 만들어낸 사회 변화

엄대섭의 생애는 한 개인의 확고한 신념과 실천이 얼마나 큰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독서와 도서관”에 외곬 인생의 승부를 걸고서, 실망과 좌절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사회 인식의 절벽을 허물고, 책과 도서관의 가치를 이해시키고자 끝없이 도전했습니다.

사재를 털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 이타정신

엄대섭은 자신이 젊은 시절 어렵게 모은 재산을 모두 도서관과 마을문고 설립에 쏟아부었습니다. 경주의 문전옥답 4두락을 팔아 마을문고 1호점을 만들었고, 초기 몇 년간은 본인의 사재로서 마을문고 운동의 관리운영비를 충당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로, 개인의 부를 사회 공익을 위해 사용한 숭고한 정신을 보여줍니다.

현장 중심의 실천적 개혁정신

엄대섭의 개혁 방식은 철저히 현장 중심이었습니다. 65세의 나이에 전국 160여 개 공공도서관을 자가운전으로 직접 방문하여 실태를 조사한 것은 그의 실천적 개혁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큰 어려움과 싸울 때는 현장 어려움의 ‘반복 실감’을 통해서 인고(忍苦)의 내공을 쌓아 폭발시키는” 특유의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정책 결정자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자세입니다.

10장: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한 엄대섭 정신

정보 접근권의 민주화

엄대섭이 추구했던 도서관의 개가제, 관외대출, 입관료 폐지 등은 본질적으로 정보 접근권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정보 격차 해소,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온라인 정보 접근권 확대 등의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지역 공동체 문화 센터로서의 도서관

엄대섭이 구상했던 마을문고는 단순한 책 보관소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책과 독서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는 현재의 공공도서관이 지역 공동체의 문화 센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방향성과 일치합니다.[4]

평생교육과 문화 민주주의

엄대섭의 도서관 운동은 모든 국민의 평생교육권과 문화향유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21세기에도 평생학습사회 구현, 문화 민주주의 실현, 교육 기회 균등 등의 과제는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의제입니다.

결론: 엄대섭이 꿈꾼 대한민국

엄대섭 선생이 꿈꾼 것은 단순히 도서관이 많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책을 읽고, 지식에 접근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애국과 사회봉사는 거창한 구호나 이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구체적인 실천에 있다는 것을.

“60년 전 엄대섭 회장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처럼, 그의 정신은 오늘도 전국의 도서관과 작은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의 눈빛에서, 지식을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엄대섭 선생이 일생을 바쳐 만들어준 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엄대섭 선생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가 될 것입니다.

엄대섭(嚴大燮, 1921-2009). 그는 책과 함께 살았고, 책을 위해 죽었으며, 책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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